DAY 6

실로(Shiloh)는 벧엘 북동쪽 16㎞ 지점,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후 예루살렘에 정착하기 전 369년 동안 하나님의 언약괘가 머물던 곳이다. 사무엘이 다스리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수도로 여겨졌던 곳이고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던 곳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7:12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가 실로라고 말씀하고 있다. 실로라는 단어가 처음 성경에 등장하는건 창세기 49장이며 메시야의 이름을 대신하여 쓰여졌다. 

 

실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세기 49:10

그다음에, 성경에서 지명으로 등장할 때는 여호수아가 실로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에 땅을 기업으로 나누어 줄 때이다. 실로의 원어 뜻은 하나님의 선물, 유업을 뜻한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고 그가 주시는 기업이 나누어지는 곳이다. 인도자는 우리에게 요단강에 머물지 말고, 길갈에서도 말고, 계속 전진하여 실로에 오라고 도전했다. 요단강을 건너 침례받고, 길갈에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벗겨 냈지만 거기가 머물 곳은 아니다. 심지어 여리고를 점령해서 승리를 얻은 그곳도 머물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가 있고, 우리의 영원한 기업을 받는 그곳까지 멈추지 말고 오라 했다. 옛사람을 버리고, 옛 생각과 세상의 속이는 거짓말을 뿌리치고. 

당신의 기업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인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모아 내 영토에 쌓아 놓는 것에 모든 시간을 소모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세상에 속은 거라 했다. 우리의 기업은 예수다. 그분만이 우리의 상급이고 최종 목표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우리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던 자리에서 함께 기도하고 또 각자의 가족과 기도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세우고 봉헌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서 제사장들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대 들어갈 때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죽은자 같이 된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보좌에 높이 들린 주를 보았을 때 이사야 6장에서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개역 개정) 혹은 “나는 죽게 되었구나” (새번역)  라 고백한다. 영어로는 “I am undone”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마치 잘 짜인 굵은 밧줄의 모든 실마리가 다 풀려서 더 이상 복구할 수 없는 상태이다.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 나타난 예수의 영광 앞에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라고 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던 중 나타난 예수의 빛앞에 엎드려 졌고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고, 마시지도 못했다. 하나님의 임재, 곧 그분의 임재 앞에서 취해지는 피조물의 마땅한 모습이다.

실로의 북편 언약궤가 놓여있던 곳

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의 위엄 (majesty)에 대해 말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셔서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 말씀 하나로 시간을 시작하시고 만물을 마치 최고의 도공이 어린아이의 찰흙을 빚듯 마음대로 창조하고 복종시키신다. 요한복음에선 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엄의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오신다. 우리가 그를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 예수는 인류 역사상 단 한명도 피하지 못한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이기시고 이제 보좌에 앉으셨다. 히브리서 1장 3절과 8장 1절에 예수께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말할때 지극히 크신 이는 ESV와 다른 버전에서 Majesty on high라고 표현된다. 그는 위엄의 주시며 위엄 그 자체시다. 그 위엄앞에 모든 무릎이 꿇어지고 모든 입이 자진하여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다.

예배는 그런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 모습은 어떠한가? 세상 왕이나 대통령 앞에서도 취하지 않을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때울 때가 대부분이다. 현대인의 바쁜 트렌드에 맞추어 예배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심지어 그들의 심지를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 선포되는 말씀의 수의도 낮춘다. 코비드 핑계로 이젠 예배당에 가는 것도 귀찮아졌다. 전에 내가 다니던 미국 교회에선 찬양 때 한 손은 주머니에 한 손엔 커피를 들고 마치 라이브 콘서트에서 흥을 즐기는 듯한 모습들이 허다했다. 핸드폰에 길들여저 집중력이 쇠퇴된 자들의 관심을 끌려 조명과 음악만 점점 더 화려해진다. 모든 게 나 중심인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가 가치 있고 위대하다는 생각은 당연한 것처럼 되었으나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에 대해서는 이해가 전무하다. 루터, 휫필드, 스프로울같은 신학자들이 쓴 글들을 보면 과연 저들이 아는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하나님과 같은 분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는 실로의 지성소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 여기에 나타났을 하나님의 임재를 상상하며 그 위엄에 압도되어 기도는 신음으로 변했다. 눈을 감고 “Oh… God… oh… God….” 만을 신음처럼 반복하였다. 최고의 예배당에서 화려한 조명과 실력 있는 연주자로 멋지게 짜인 어떤 예배와도 비할 수 없는 아무 소리 없는 예배를 마치고 실로를 내려왔다.

© www.armstronginstitute.org

우리가 있던 자리는 임신을 못하던 하나가 기도해 사무엘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실로에서 일하는 가이드가 내려오는 길에, 이곳에 왔다가 임신한 사람들이 많다는 농담을 했고, 와이프와 나는 함께 잡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놓고 버스로 돌아왔다.

원래 스케줄은 세겜땅 모레에 가야 했지만, 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모레산 길이 물에 잠겨서 이타마라는 바로 옆 산으로 향했다. 이타마 산에서도 모레산에서 볼 수 있는 전경을 똑같이 볼 수 있으며 사해, 갈릴리, 지중해 세 바다를 다 볼 수 있다. 세겜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가라고 명령하셨던 곳이다. 세겜의 원어 뜻은 ‘어깨’인데, 성경에서 어깨는 권세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이곳 세겜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눈으로 보이는 모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성경의 대부분의 사건이 아브라함이 이 산에서 눈으로 본 땅 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세겜은 사실상 이스라엘 역사의 근본이 되는 장소로 여겨진다. 그래서 둘째날에 유대인 인도자는 자신의 나라가 작지만 강렬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 도리어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창세기 15:8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래와 같이 명하신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창세기 15:9

그리고 아브라함은 바로 알아듣고 아래와 같이 행한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

창세기 15:10~11

현대 사회에선 이해 못하는 행동이지만 그당시 사람들에게는 계약을 체결할때 하는 당연한 절차이다. 우리는 계약을 체결할 때 서명을 통해 책임을 약속한다. 예를 들어, 집이나 차를 구매할 때 서명을 통해 앞으로의 채무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한다. 결혼할 때도 혼인 서류에 서명하여 앞으로의 동반자를 위해 희생하고 사랑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서명을 통한 계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왕이 신하, 하급 군주, 혹은 정복당한 군주와 계약을 맺을 때, 둘 사이에 동물을 가져와 반으로 찢어 놓았다. 그 후 왕과 신하가 모두 찢어진 동물 사이를 지나가거나, 또는 권력이 낮은 자만이 지나갔다. 이렇게 함으로써 계약 당사자들은 자신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이 찢어진 동물처럼 찢겨져 새들의 먹이가 되겠다고 서로에게 맹세하는 것이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
창세기 15:17

풀무와 횃불이라는 단어는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을 묘사할 때 쓰인 같은 단어이다. 또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구름기둥과 불기둥과도 같은 맥락이다. 성경에서 여러 번 하나님의 Shekinah 영광은 이와 같이 연기와 불로 나타난다. 아브라함과의 계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찢어진 동물 사이로 걸어가신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항상 두 가지의 질문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과연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인가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정말 그가 약속한 것들이 내 삶에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한다. 하나님은 이 질문을 하는 아브라함에게 찢어진 동물 사이로 지나가심으로 언약을 지키실 것을 확증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질문은 과연 내가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승리할 수 있을까 이다. 10번, 20번, 아니 100번 쓰러지고 넘어지는 내가 내 자신도 싫은데 그런 나를 보시는 하나님도 지치시지 않을까 의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네가 동물 사이를 걸으라 하시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혼자 걸으신다. 위에 말했듯이 계약하는 두 당사자 중 한쪽만 걸을 때는 항상 권력이 낮은 자가 걸어야 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가 스스로 완벽하게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아셨고, 그래서 그분이 대신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게 복음이다.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해 이루는 구원이 아닌 일방적인 은혜이다. 그가 시작하시고, 그가 언약하시고, 그가 이루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하신다. 너희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해도 그 값을 자신이 받으시겠다고.

‘너가 만약 우리의 관계를 깨도
나의 불변성이 변이를 경험할 것이고
나의 불멸성은 죽음을 겪게 될것이고
나의 무한성은 한계를 겪을 것이고
나의 전능은 무력함을 겪게 되고
나는 내쳐지고 파괴되며
내 몸은 찢겨져 조각날 것이다.’
(Tim Keller 설교중)

이 언약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는 이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 지옥 그 자체가 십자가 위로 쏟아져 내렸고 그는 찢겨저 조각이 났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가운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동기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세겜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우리 모두에게 하신 언약이다. 

기가막힌 노을이 산에서 내려오는 우리를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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